찬양 많은 이 필요한가

오래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책상 앞에 앉아서 찬송가 책을 펴고 한두 곡을 선곡해서 전화기로 찬송을 틀어놓고 작은 소리로 따라 부르는 것이다.

하루를 찬송가로 시작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가장 최우선 자리에 두고 높이겠다는 부족한 내 고백과 함께 하루를 살면서 듣게 될 모든 소리에 앞서 가장 먼저 신성한 찬송가를 내 귀가 들리게 하자는 뜻이다.

600곡이 넘는 찬송가 중에서 곡을 고르다 보면 가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제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새로운 곡도 불러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곧 익숙해진 곡을 찾아 듣곤 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 찬미가 필요한가. 사람마다 다르겠지. 내 경우 한국교회의 공용 찬송가에 신학적 음악적 문학적으로 어우러진 좋은 성가와 복음송을 조금 더 하면 신앙생활에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찬양 많은 이 필요한가 1

필자는 예로부터 칭찬의 과잉이라는 말을 자주 해 왔다.

이 말이 주제넘고 적절한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주로 현대 팝, 록 스타일의 소위 컨템퍼러리 찬양 과잉이라는 말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기도회나 집회, 행사에서 찬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본 행사에 앞서 찬양을 너무 길게 하고 때로는 기도는 물론 목사의 말씀에까지 찬양을 반주 형식으로 지나치게 깔아놓는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필요한 만큼 꼭 들어가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악기에서도 쉽게 피아노 하나가 되는 것을 일렉트릭 기타, 드럼, 베이스, 키보드까지 동원해 음량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 이들도 과잉이라고 생각한다.

기도회나 집회에서 이런 과잉 경험을 하면 그것이 오히려 분위기를 해치고 역효과를 낸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이른바 찬양사역에 나선 이들의 수도 과잉이 아닌가 싶다.

◆듣기로는 해외선교를 꿈꾸는 청년수는 갈수록 줄어든다고 하지만 찬양가수나 밴드 멤버를 희망하는 수는 반대인 것 같다.

이들이 한국의 연예인 선망 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

오늘날 해외와 한국의 CCM을 듣다 보면 상투적인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세속 팝, 록 스타일의 패턴화된 연주 방법과 연예인 흉내를 내는 패션이 만연해 있다.

교회 역사에서 찬양과 찬양 사역이란 말이 지금처럼 헐값으로 나온 적이 있었던가.

찬양 많은 이 필요한가 2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 지나치게 찬양(위십송 등 CCM류)을 강조하는 교회의 보편적 특징 중 하나는 정통신학(신앙)과는 거리가 멀거나 먼 교회라는 것이다.

이른바 번영신학(예수를 믿으면 건강과 재물, 성공이 보장된다)을 주창하는 교회가 대표적이다.

이단적인 교회도 컨템퍼러리의 칭찬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나 신학을 합리화하거나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청년 중심의 찬양문화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찬양에 열광하는데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말과 신학이 왜곡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려지고 조성된 찬미의 열광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신비주의적 감상적 이단 이교적 신앙에 빠질 위험성이 매우 높다.

오늘날 서구 오순절은 사주팔자에 의한 대규모 교회가 만들어 내는 찬양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세계적으로 CCM류의 컨템퍼러리 찬미가 청소년과 젊은이의 예배와 신앙생활의 지배적 찬미문화로 자리잡으면서 교회의 전통 찬미문화는 코너에 몰리고 있다.

부모 세대의 고귀한 신앙유산을 불과 한 세대 만에 쇠퇴의 길로 진입시킨 것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교회의 치명적인 실패다.

  • 2022.3.22 등대지기